하와이의 한 그릇, 사이민
이민자들의 식탁에서 태어난 따뜻한 국수
하와이를 대표하는 면 요리 ‘사이민(Saimin)’은 섬 곳곳에 펼쳐진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던 이민자 노동자들의 삶에서 비롯되었다.
돼지고기 뼈, 말린 새우, 파, 어묵 등 농장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소박한 재료들로 끓여낸 국물에 얇고 부드러운 면을 넣어 만든 음식.
국적도, 언어도 달랐던 사람들이 하나의 그릇 안에서 어울렸던 것처럼, 사이민은 하와이의 다문화적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음식이다.
하와이의 정겨운 맛, 사이민
어릴 적 자주 가던 지피스(Zippy’s)나 동네 로컬 식당에서 먹던 사이민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맛이었지만, 언제나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식이었다.
수영을 마치고 젖은 머리로 수저를 들던 기억, 비 오는 날 가족들과 가게 한쪽에 앉아 조용히 국수를 먹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간혹 여행자들은 이 소박한 국수의 정체를 궁금해하지만, 하와이 사람들에게 사이민은 그저 설명이 필요 없는 ‘익숙한 따뜻함’으로 남아 있다.
일본 라멘이나 한국 우동과도 닮았지만, 그 어느 것과도 완전히 같지는 않다. 국물의 깊이나 면의 쫄깃함보다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 음식”이라는 정서, 그것이 사이민을 하와이의 국민 음식으로 만든 이유일지 모른다.
때로는 작은 테이크아웃 박스에 담긴 사이민 한 그릇이, 어떤 고급 요리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리움이 더해진 맛
지금은 많은 식당에서 라멘이나 우동처럼 더 복잡하고 정교한 사이민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절 간이식당의 소박한 사이민이 그립다.
그 맛이 정말로 맛있어서 그리운 건지, 아니면 그 속에 스며든 기억이 그리운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 한 그릇이 주는 따뜻함은 언제나 내 마음을 데워준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카우아이(Kaua‘i)에 들러 하무라 사이민 스탠드(Hamura Saimin Stand)에 가면,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시간을 되돌아보는 여행처럼 느껴진다.
U자형 카운터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이민을 앞에 두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도 몸도 풀어지는 기분이다. 새우튀김을 사이드로 하나 집어 들고, 릴리코이 시폰 파이로 마무리하는 그 순간까지.
그리운 맛, 그리운 공기, 그리고 변하지 않는 풍경이 조용히 한데 어우러진다.
이민자들의 그릇에서 태어난 문화
사이민은 단순한 국수가 아니다. 그것은 하와이 이민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문화의 연대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에서 생활하던 중국, 일본, 한국, 필리핀, 포르투갈 노동자들은 서로의 음식을 나누며 이른바 ‘혼합된 식탁(Mix Plate)’ 문화를 만들어냈다.
각자의 음식은 하나의 냄비 안에서 이어졌고, 그렇게 사이민이라는 하와이만의 독창적인 음식이 탄생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한 그릇에 5~10센트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던 사이민은 농장 노동자들의 든든한 한 끼가 되었다. 시로마 사이민(Shiroma’s Saimin)은 하루 종일 문을 열며 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대표적인 노점이었다.
그 한 모금, 한 젓가락에는 면과 국물뿐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교차하던 노동자들의 삶과 연대가 담겨 있다.
하와이에서 사이민이란
사이민은 단지 국수가 아니다. 뿌리 없는 땅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도 하와이 곳곳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위로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기억, 공동체와 공동체를 연결하는 따뜻함.
하와이에서 사이민은 언제나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람들의 곁에 남아 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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